영화 블루 발렌타인은 연애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보여 주는 작품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과 웃음이 얼마나 찬란했는지와 동시에 그 사랑이 어떻게 부서지고 사라지는지를 정면에서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저 사람들도 저렇게까지 사랑했는데 왜 처음의 그들로는 돌아갈 수 없었을까. 이 질문은 결국 우리 자신의 관계를 향해 돌아옵니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와 그렇게 웃으며 시작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멀어졌을까. 이 글에서는 블루 발렌타인을 중심으로 사랑의 초반과 후반을 나란히 놓고 보면서 왜 우리는 처음의 우리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느끼는지 연애와 결혼 심리의 관점에서 차분히 짚어 보겠습니다.
처음의 우리는 왜 그렇게 눈부셔 보였을까
블루 발렌타인의 초반부는 두 사람의 시작을 아주 따뜻하게 보여 줍니다. 딘과 신디가 처음 가까워지는 장면을 떠올려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기분 좋은 존재였는지가 분명합니다. 딘은 유머와 즉흥성을 가진 사람이고 신디는 조심스럽지만 마음 깊은 곳에 여린 부분이 많은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신디에게 딘은 삶을 잠시 가볍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고 딘에게 신디는 자신을 어른으로 만들어 주는 계기를 준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관객이 이들의 시작을 사랑스럽게 느끼는 이유는 이 장면들 안에 많은 관계의 초반 공통점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털어놓고 상대가 그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순간에 우리는 깊은 유대감을 느낍니다. 블루 발렌타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딘과 신디는 서로의 가족사와 과거의 연애 이야기와 혼자 감당해야 했던 고통을 나누면서 점점 가까워집니다. 상대가 나의 상처를 알고도 떠나지 않을 때 사람은 강한 연결감을 느끼고 이 관계를 특별한 인연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한 연애 초반의 우리는 상대의 장점만을 크게 확대해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딘의 유머는 책임감 부족과는 별개로 보이고 신디의 냉정함은 자기 보호를 위한 성숙함으로 보입니다. 그때의 우리는 상대의 단점도 다 이해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을 가집니다. 언젠가 이런 말도 쉽게 떠올립니다. 이 사람과는 왠지 다를 것 같다는 확신입니다. 블루 발렌타인의 시작 부분은 바로 그 착한 자기 확신이 어떤 기대를 만들고 어떻게 나중의 실망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보여 주는 장면들입니다. 처음의 우리는 늘 조금 과장된 희망과 함께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더 아름답고 동시에 더 위험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아니라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벌어지는 일들
영화가 현재의 시간대로 넘어오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딘과 신디는 이미 결혼했고 아이를 함께 키우고 있습니다. 처음의 설렘 대신 피로와 짜증이 일상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둘이 서로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기보다 사랑이 생활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연애 초반에는 서로에게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관계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생활이 시작되면 에너지는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기 마련입니다. 생계와 육아와 집안일과 각자의 직장 문제까지, 신경 써야 할 항목이 갑자기 늘어납니다. 블루 발렌타인에서 신디는 직장에서의 압박과 가사와 육아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반면 딘은 현재의 삶에 안주하며 더 나아지려는 시도에는 마음을 크게 쓰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려 하고 신디는 이 상태로는 버티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방향성 문제로 이어집니다. 한 사람은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느끼고 다른 한 사람은 여기서 조금 더 변화하지 않으면 자신의 삶이 무너질 것 같다고 느끼는 상황에서는 갈등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블루 발렌타인에서 신디는 점점 더 지쳐 가고 딘은 왜 자신이 계속 비난받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하는지 억울해 합니다. 같은 집 안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두 사람이 바라보는 풍경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생활이 시작되면 초반에는 귀엽게 보이던 특성이 점점 부담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딘의 자유로운 태도와 장난기는 처음에는 매력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책임감 부족처럼 느껴집니다. 신디의 예민함은 한때는 섬세함과 진지함으로 보였지만 지금은 끝없는 비난처럼 다가옵니다. 서로가 처음에 사랑했던 부분이 그대로 있는데도 그 의미가 달라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자주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전의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러나 사실은 상대가 완전히 바뀐 것이 아니라 내가 두 사람의 관계를 바라보는 맥락이 바뀐 경우도 많습니다.
왜 처음의 우리로 돌아가자는 말이 통하지 않을까
블루 발렌타인을 보다 보면 딘이 반복해서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그는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고 거기에 다시 돌아가자고 제안합니다. 특별한 숙소를 예약하거나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면서 예전처럼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갖자고 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시도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많은 커플들이 관계가 힘들어질 때 비슷한 방식으로 초반의 감정을 되살리려 합니다. 예전에 자주 가던 식당에 다시 가거나 처음 여행을 떠났던 장소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블루 발렌타인에서 이런 시도를 볼 때 관객은 묘한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신디의 표정에서는 피로와 냉담함이 동시에 읽힙니다. 그녀에게는 이미 이 관계가 감정적으로 거의 소진된 상태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딘이 아무리 초반의 장면을 재현하려 해도 그 시간이 지금의 현실을 덮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신디는 알고 있습니다. 딘이 보는 과거는 두 사람의 가장 행복한 순간들만 모아둔 편집본에 가까운 반면 신디가 기억하는 과거에는 그 순간들 사이를 채우던 다툼과 서운함과 실망이 함께 떠오릅니다. 두 사람이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추억을 떠올려도 전혀 다른 감정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연애나 결혼에서 처음의 우리로 돌아가자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시간 그 자체가 사람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고 지금의 상대도 그때의 상대가 아닙니다. 블루 발렌타인에서 신디는 더 이상 순수하게 사랑만 생각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직장에서의 위치와 아이의 미래와 자신의 건강과 정신 상태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딘 역시 젊은 날에 비해 책임에 눌려 있고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과거의 한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다고 해서 그때와 같은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은 어렵습니다. 결국 처음의 우리로 돌아가자는 말은 현실을 바꾸기보다 감정을 잠시 속이는 방법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의 문제를 제대로 마주하고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이야기하지 않은 채 좋았던 시절의 분위기만 꺼내서는 상처가 잠시 덮이는 정도에 그치기 쉽습니다. 블루 발렌타인은 이 한계를 매우 솔직하게 보여 줍니다. 두 사람은 특별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더 깊은 상처와 폭발적인 갈등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돌아가자는 말은 아름답지만 실제로 우리를 구하는 것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는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블루 발렌타인이 던지는 질문 지금의 나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마음 한편이 오래 울리는 느낌이 남습니다. 블루 발렌타인은 누군가를 악역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딘이 무책임하고 신디가 냉정한 면이 분명 있지만 둘 중 누구도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서로 다른 상처와 기대와 두려움을 가진 두 사람이 시간 속에서 조금씩 어긋난 결과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더 불편해집니다. 화면 속 이야기가 단순한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라 언젠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이것일 것입니다.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관계에서 나는 어디쯤 와 있는가. 아직 서로를 위해 변하려고 애쓰는 지점에 있는가 아니면 이미 마음이 거의 닫힌 상태에서 습관과 책임만으로 버티고 있는가. 처음의 우리로 돌아가자는 말에 진심으로 끌리는가 아니면 그 말이 더 이상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있는가. 블루 발렌타인을 연애 심리의 관점에서 다시 보면 몇 가지 점검 질문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상대의 단점만 점점 크게 보이고 장점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 시점에 와 있지는 않은지. 대화를 시작하면 해결을 위한 대화가 아니라 과거의 서운함을 다시 꺼내는 순환에 빠지고 있지는 않은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움보다 긴장과 피로를 더 많이 남기고 있지는 않은지. 이 질문들에 솔직하게 답해 보면 지금의 내 관계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조금 더 명확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영화 속 딘과 신디가 처음의 우리로 돌아가지 못했던 이유는 사랑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상처와 오해를 제때 풀지 못한 채 쌓아 두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비슷합니다. 작은 서운함을 넘기는 데 익숙해져 버리면 어느 순간 그것이 관계의 기본 정서가 됩니다. 그러고 나서야 처음의 우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블루 발렌타인은 관계를 단순히 희망적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랑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무너지는지 아주 가까이에서 보여 줍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거의 행복했던 장면만 붙잡고 돌아가고 싶어 하기보다 지금의 관계를 솔직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직 변화의 여지가 있다면 어떤 부분부터 조금씩 다르게 선택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미 마음이 완전히 닫힌 상태라면 서로를 더 망치기 전에 어떤 정리가 필요한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처음의 우리로 못 돌아간다는 말은 슬프지만 동시에 현실을 인정하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제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남고 싶은가. 블루 발렌타인은 바로 그 질문을 관객 각자에게 조용히 건네는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