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카지노를 보고 나면 묘한 기분이 남습니다. 한편으로는 나쁜 짓 한 사람은 결국 대가를 치른다는 식의 권선징악에 가까운 결말처럼 보이는데, 또 한편으로는 저런 사람과 저런 판이 실제로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 같다는 현실감 때문에 쉽게 속이 시원하지만은 않습니다. 차무식이라는 인물은 전형적인 악당처럼 보이면서도, 우리가 성공과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용인해 온 태도들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얼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카지노는 단순히 “한국 아저씨들이 필리핀에서 벌이는 갱스터물”로 보기에는 어딘가 찝찝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냉정한 다큐처럼 받아들이기에도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 드라마틱합니다. 이 작품을 권선징악으로만 볼지 현실 고발에 더 가깝게 볼지는 결국 각자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의 문제인데,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어떤 욕망과 피로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시원한 판타지처럼 보이는 순간들
카지노를 처음 볼 때 많은 사람이 가장 먼저 느끼는 건 통쾌함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밑바닥을 전전한 차무식이 필리핀 카지노판의 중심으로 올라가는 과정은 장면 하나하나만 떼어 보면 꽤 매혹적입니다. 위험한 선택과 빠른 머리 회전, 상대방의 심리를 읽어내는 감각, 위기 상황에서 밀어붙이는 배짱까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수완 좋은 사람”의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지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길을 뚫고, 외국인과 한국 조직 사이를 오가며 협상을 이어가는 모습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 “능력”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시청자는 이 과정을 보면서 동시에 두 가지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잘났다 싶다가도, 저 정도 스케일의 일을 저렇게 밀어붙이는 사람을 현실에서 마주친다면 솔직히 무서울 것 같다는 감정이 뒤섞입니다. 그래도 초반에는 이야기의 속도가 워낙 빠르고, 승부에서 이기는 장면들이 이어지다 보니 일종의 판타지처럼 소비되기도 합니다. 못난 어른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어른의 모습이 먼저 보이는 순간들입니다. 그러다 서서히 균열이 드러납니다. 차무식이 지키려는 것은 사업과 돈만이 아니라 자기 자존심과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부터 이야기는 조금씩 방향을 바꿉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올라오는 동안 누가 얼마나 바닥으로 떨어졌는지, 얼마나 많은 폭력과 협박이 그 자리를 버티게 해 줬는지 슬쩍슬쩍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카지노는 더 이상 시원한 성공담이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무너질 줄 알면서도 계속 키워 온 탑을 바라보는 느낌을 줍니다. 이 지점에서 작품은 권선징악의 기본 골격을 깔아 둡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수완이 좋아도 결국 법과 수사의 칼날을 피하지는 못한다는 식의 구조죠. 시청자도 그 공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수사망이 조여 오고, 언젠가는 큰 대가를 치를 거라는 걸 어렴풋이 예상합니다. 그래서 후반부로 갈수록 “그래, 저 정도 했으면 이제 한 번은 걸려야지”라는 감정이 서서히 올라옵니다. 이게 바로 카지노가 제공하는 첫 번째 층위의 카타르시스입니다.
권선징악 공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찝찝함
문제는 이 드라마가 그 정도에서만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만약 카지노가 악한 사업가 하나를 내세워 경찰에게 잡혀가는 과정을 속 시원하게 보여주는 데서 끝났다면, 시청자는 편하게 “봤다, 통쾌했다” 하고 덮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작품은 차무식만 악한 사람으로 두지 않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각자의 사정과 계산을 안고 움직이는 수많은 인물이 있고,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어정쩡한 회색 지대에 서 있습니다. 돈 때문에 타협하는 사람, 두려움 때문에 눈감는 사람, 줄을 잘못 서서 이용당하는 사람,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차무식 곁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까지. 이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 질문이 달라집니다. 정말 “나쁜 놈들은 다 벌받는다”는 말이 통하는 세계인지, 아니면 운 없게 걸려든 몇 명만 보기 좋게 처벌받고 나머지 판은 그대로 굴러가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수사하는 쪽 역시 완전히 깨끗한 정의의 편이라기보다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지점이 분명히 보입니다. 법과 제도라는 것도 결국 사람 손을 거쳐야 움직이고, 그 안에는 이해관계와 정치적인 계산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드라마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다 보니 차무식의 추락이 그리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한 짓을 생각하면 분명 맞는 결말인데, 그렇다고 이게 “세상이 결국은 잘 돌아간다”는 증거처럼 여겨지지도 않는 겁니다. 오히려 이 판이 이 정도에서 정리된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씁쓸한 감정이 남습니다. 시청자가 마지막 회를 다 보고도 개운함과 함께 묵직한 허탈함을 느끼는 건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그래, 저 사람은 걸렸어. 하지만 저런 종류의 사람과 구조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거야”라는 예감이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이럴 때 권선징악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선의 승리라기보다, 어쩌다 한 번 제대로 걸린 사건이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카지노가 불편하게 남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결국 정의가 이겼다”는 문장 하나로 덮어버리기에는, 그동안 화면에 쌓인 현실의 무게가 너무 크게 느껴지는 겁니다.
현실 고발로 읽을 때 더 또렷해지는 것들
카지노를 현실 고발에 가깝게 바라보면, 작품에서 유난히 강조되는 장면들이 눈에 더 들어옵니다. 현지 노동자들이 어떤 식으로 이용당하는지, 빚과 폭력이 어떻게 사람을 옭아매는지, 국적과 계급이 뒤섞인 공간에서 누가 가장 먼저 희생되는지 같은 것들입니다. 드라마는 이를 노골적으로 설교하지는 않지만, 일부러 카메라를 오래 머무르게 하거나, 대사 없이 인물의 표정만 보여주는 식으로 계속 상기시킵니다. 차무식이 대표하는 건 사실 한 개인의 악랄함이 아니라 돈이 모든 룰을 바꾸는 세계입니다. 돈이 모일수록 사람들은 더 많이 참아야 하고, 더 많이 침묵해야 하고, 더 많이 타협해야 합니다. 경찰과 공무원, 브로커와 조직원까지 각자의 위치에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되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이 말은 책임을 피할 때도 쓰이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달래기 위한 주문이기도 합니다. 한국 시청자에게 카지노가 유난히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필리핀이라는 공간은 다르지만, 돈과 권력, 줄과 줄이 맞닿는 방식은 어딘가 익숙합니다. 뉴스에서 본 사건들, 기사 제목에서 지나가듯 본 갑질과 비리의 구조가 드라마 안에서 더 큰 스케일과 강도으로 반복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장면들은 오히려 과장된 픽션이라기보다, 우리가 못 본 실제를 조금만 과장해 보여 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결국 카지노를 권선징악으로 볼지 현실 고발로 볼지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둘 중 하나만 붙잡고 보기에는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얼굴이 너무 많습니다. 차무식이라는 인물을 통해 “저렇게 살면 언젠가 무너진다”는 교훈을 읽을 수도 있고, 동시에 “저런 사람이 버젓이 판을 키울 수 있는 구조 자체가 문제”라는 냉정한 인식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중요한 건 어느 쪽이냐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이 작품을 보고 난 뒤 내 머릿속에 어떤 질문이 남는지 스스로 확인해 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성공을 떠올릴 때 과정까지 함께 생각하는 사람인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을 볼 때 그 뒤에 있는 구조를 같이 떠올리는지, 내 일상에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쓰고 있는지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카지노는 아주 큰 소리로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조용하게 오래 가는 질문을 남기는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보면서 느꼈던 불편함과 묵직함을 너무 빨리 잊지 않는다면, 그 질문이 꽤 오랫동안 우리 머릿속에서 일을 할 것 같습니다.